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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8이다. 두 달이 지나고 한 해를 더 보내면, 어느새 서른이다. 내가 곧 서른이 된다니-하고 오늘 난생 처음 상상해본다. 30대의 나는 어떨까. 좀 더 여유롭고 좀 더 재미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28살에 벤츠 S600을 몰고다니거나, 본인 소유의 빌딩이 서울내 맥도날드 영업점만큼 많거나,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걸작 소설을 완성했거나, 애를 대여섯명씩이나 낳아제꼈거나 뭐나, 2년 후면 모두 서른이 된다. 할부도 안되고, 후납도 안된다. 30년을 살았으면, 30살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듯이, 술을 마셨으면 취하듯이.
어릴 때는 모든 것이 불명확했다. 반투명한 셀로판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말이다. 그 때는 모든 것이 그저 가능할 것만 같았고 대부분의 것들이 희망찼다. 난 2000년쯤 되면 자동차가 날아다닐 줄 알았다. 20대의 계절이 검고 붉게 흘러가면서 누군가가 내 셀로판지를 비정한 손길로 빼앗아가버렸을 때, 나는 내 기대에 그리 못미치던 세상과 또 나 자신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이자 뒤통수를 치는 조용한 구타였다. 난 어느새 모든 것이 그리 궁금하지 않은, 10년전만 해도 바보같다고 생각하던 20대 후반이 되어있었다.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리고, 하고싶은 일이 그리 많지 않은, 어느새 몽상과 공상이 망상으로 변해버린 그냥 저냥의 아저씨.
예전 디즈니 작품 중에 스크루지 덕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로 등장하는 그 도널드 덕은 거대한 탑안에 금화를 잔뜩 쌓아놓고, 그 안으로 다이빙해 수영을 즐긴다. '돈지랄'이란게 뭔지 최초로 알게 된 애니메이션이었고, 돈만 밝힌 나머지 친구 하나 없는 주인공을 동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오리 따위가 부러울 따름이다. 이게 바로 때묻은 어른이란 것이다.
돈을 벌고 싶다.
최고급 오디오를 갖고 싶다.
30평 정도의 아파트를 갖고 싶다.
아무래도 차는 수입차가 낫지 않을까.
역시 웰빙이 최고지. 아니 요즘은 그것보다 로하스라던데.
질투, 시기, 막연한 부러움, 욕망, 망상, 욕심, 허영, 고집, 독선, 아집, 편견, 죄책감, 그리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헉헉 거리는 나약한 폐와 이따금씩 쑤셔오는 허리 - 따위의 기타 등등. 그야말로 '기타 등등.' 얻지 않는 것이 훨씬 좋을 것들만 잔뜩 끌어안고 있다. 총천연색이었던 셀로판지는 이런 것들 덕분에 흐리고 탁하게 물들어 내 시야를 가린다. 길을 잃은 걸까.
서른이 되기 전에 말끔한 청소가 필요하다. 막강한 클리너와 든든한 조력자를 곁에 두고, 붉은 띠를 질끈 감아메고 고개를 흔들어대며, 시야를 흐리는 모든 것들을 시원스레 몰아내야겠다. 길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달리면 된다.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씩 또박또박 발걸음을 내딛으며. 아직 지불해야 할 시간은 무한하다시피 하고, 난 내 값을 제대로 매겨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