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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검은발개/감상 2007. 9. 28. 13:10
영화의 기본 시놉시스는 이렇습니다.
"매맞는 게 일상다반사인 약골도범, 외모는 야생버섯이나 심성은 비닐 하우스 속 꽃봉오리 같아 수시로 상처받는 소심근영, 이십대 중반이지만 공부건, 구직이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무뇌종만. 이 함량미달 굴욕 3인조들이 교도소에 수감된 채 출산이 임박한 도범 아내의 보석금을 위해, 우즈베키스탄 맞선 사기로 날린 근영 어머니의 틀니값을 위해, 그리고 백수로서의 품위유지비(?)를 위해 통 크게 한 탕을 터뜨리기로 마음먹는다.
목표는 국밥재벌 권순분 여사. 여자이니 약골도범보다 힘도 약할 것이고 고령이니 소심근영보다 어리버리할 것이고, 돈은 쌓아놓고 사실테니 무뇌종만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도범은 죽도록 맞고 근영은 눈물마를 날이 없다. 그리고 돈은??? 자기가 몸소 몸값을 받아주겠다는데...그 금액이 500억!!!! 엄청난 인질을 건드렸다. 엄청난 드림팀이 결성됐다."
김상진 감독의 영화들 중 대표적인 것들이 그래왔듯, 영화의 기본 정서는 '따뜻한 심성을 지닌 루저들을 향한 애정'에서부터 기인합니다. <돈을 갖고 튀어라> 부터 <주유소 습격사건>, <광복절 특사> 까지, 주인공들은 저마다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고, 거의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쩔수 없는 상황 때문에 범죄자로 내몰리게 됐다는 설정이죠. 이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성은 착한 아들인데 세상이 힘들어서 나쁜 짓을 하게 됐다" 라는 권순분 여사의 극중 대사에도 나오듯이 납치범인 세사람은 불쌍한 인물들입니다. 교도소에 수감 된 만삭의 아내를 위해, 거금을 사기 당한 농촌 총각이 그 돈을 다시 벌기 위해 그들은 일명 국밥재벌로 통하는 권순분 여사를 납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런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매우 효과적인 감정 이입을 가능케 합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그들보다 못한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고 동정어린 시선과 함께 공감 가득한 고개짓을 하게 되죠. 비극의 정통적인 기능을 매우 적절하게 사용하는 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 김상진 감독의 이러한 영화적 전략에 쉽게 동의하기 힘듭니다. 당위성이 충분하지가 않아요. 본성은 굉장히 착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도, 범죄를 결심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망설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세 사람의 리더격인 '강도범'(이름부터 범죄자입니다.) 은 말 할 것도 없고, 순박한 농촌 총각인 문근영 또한 조금 꺼려하긴 하지만 단지 그 뿐입니다. 게다가 강도범의 처남이자 이 삼인조의 마지막 인물인 종만은 아예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저냥 동료들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전 그들의 선택을 마냥 동정 할 수 만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선 충분한 고민도, 필연적인 이유도 보이지 않거든요.
그들의 납치는 거의 숙명적인 멍청함 때문에 초장부터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납치를 시작하자마자 인질인 권순분 여사에게 휘둘리는데, 그 급격한 상황 반전은 조금 당혹스런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납치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태연하고 당당한 권여사의 모습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지나치게 고분고분한 납치범들의 모습도 잘 와닿지 않습니다. 감독은 비현실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이러한 캐릭터 묘사 또한 동정어린 시선에 의해 적당히 동의 되도록 장치해놓고 있는데요. 비정한 자식들의 모습은 권여사의 심리 변화에 그럴 듯한 등가를 부여하지만 역시 충분하지 않고, 납치범들이 휘둘리는 이유가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권여사의 카리스마라는 설정 또한 충분하지 않습니다.
캐릭터 묘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권순분 여사의 캐릭터는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거의 초인에 가까운 용의주도함과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상황 판단력과 결단력 또한 엄청난 수준입니다.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서 국밥집 주인만 하는 것이 아까울 만큼 훌륭한 사기꾼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 것은 결말 부분 박상면이 분한 경찰서장 안재도의 대사 "이 정도 계획이라면 당연히 어머님이 꾸미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는 부분에서 적당히 얼버무려집니다. 원래부터 이 인물이 굉장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인데, 이 부분 또한 설명이 충분치 않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권여사의 범죄자로서의 그만큼 굉장한 것이었으니까요. 루팡도 저리가라 할 정도 였습니다.
그에 비해 박준면씨가 분한 안선녀의 캐릭터는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엄청난 거구의 대식가인데다가 힘이 천하장사인 여자. 자칫하면 그 누구보다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비춰 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연기자는 뛰어난 캐릭터 이해도와 연기력을 통해 훌륭하게 소화해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물인데요. 연출자의 적절한 캐스팅과 연기자의 역량이 잘 조화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건이 분한 종만의 캐릭터는 그 존재감이 거의 희미합니다. 영화 내내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정도입니다. 어쩌면 편집 과정에서 많이 들어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보여지는 김상진 감독의 캐릭터 묘사에 대한 강박관념을 생각해본다면 아리송할 지경입니다. 하다 못해 짧은 플래시백이라도 한 번 나올 듯 한데, 그저 추측이지만 왠지 불충분한 연기 때문에 잘려나갔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땐 웰메이드 코미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까지 '재미'의 기본요소들을 잘 지켜나간 한국 코미디 영화는 많지 않거든요. 적절한 대사 처리와, 진부한 면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꼼꼼한 상황 설정들은 훌륭합니다. 천박한 비속어로 억지웃음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단편적인 유머 요소들을 갖다쓰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주연 배우들은 이제까지의 영화에서 조연만 맡아오던 분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비교적 잘만든 영화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호흡이 쳐지는 것이 약간 아쉽지만 그렇게까지 지루하진 않습니다. 적어도 반전에 집착하거나 흐지부지 끝내진 않으니까요.
-여담이지만, 권순분 여사의 경상도 사투리는 고향이 부산인 제가 듣기에는 약간 거슬렸어요. 억양이 지나치게 쎄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