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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행복
    검은발개/감상 2007. 10. 16.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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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 또한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이 걸어온 길을 비슷하게 이어나갑니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인 듯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방식의 멜로물인 듯한, 헷갈리는 화법의 이야기 말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따져볼까요.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서울 남자가 병 치료를 위해 요양원을 찾게 되고, 그 곳에서 만난 폐병 걸린 시골 아가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살림까지 차리지만, 병이 낫고 시골 생활이 지겨워진 남자는 여자를 떠나게 되고, 다시 방탕한 생활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와 대면하게 됩니다.
    끝입니다. 매우 통속적인 멜로물의 이야기이죠. 새로운 소재도, 특별히 눈에 띌 만한 이렇다 할 요소도 없는 아주 상투적이고도 간단한 내용입니다.

    허진호 감독의 강점은 이러한 상투적인 이야기를 독특하고 세련된 화법으로 풀어나간다는데에 있습니다. 참신하고 은유적인 대사와 차분하면서도 디테일한 캐릭터 묘사,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찰나의 감정들이 스쳐지나가는 순간들을 콕콕 집어내는 솜씨가 매우 훌륭합니다. (개인적으로 전 이렇게 미시적인 시각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감독들이 참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점은,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들을 잡아내는 감독의 역량입니다. 영수를 처음 만난 은희가 몰래 거울을 보며 얼굴을 점검한다던가, 녹즙을 건네며 혈액형을 물어본다던가 등의 상황 묘사는 사실 일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굳이 영화에서 표현하기는 어려운 점입니다. 못 만든 멜로에서라면 갑작스런 고백과 함께 와락 끌어안는 포옹 정도로 표현되기 쉬운 장면들이죠.
    영수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묘사한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과 춤을 추던 은희가 옆 사람에게로 가기가 무섭게 손을 잡아 끄는 영수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귀엽습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란 것은 저렇게나 일상적이고 자그마한 순간이 축적되는 과정들에 있거든요. 무척이나 사실적이지만 또한 무척이나 참신한 종류의 묘사입니다.

    이야기 내내 은희는 영수보다 어른스럽습니다. 자기파괴적인 행동에 익숙한 영수보다, 순간 순간의 행복을 즐기고 자신의 고통을 조용히 속으로 달래는 은희의 모습은 마치 영수의 엄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별을 할 때도 어른스럽게, 조용히 영수를 보내죠. 동안으로 유명한 임수정이 황정민과 과연 어울리기나 할 지 우려했지만, 캐릭터 덕분에 자연스레 녹아 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수는 은희와 함께 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겐 맹목적인 애정을 표현하는 은희보다 자신의 자학적인 성향을 그대로 표출 해 낼 수 있었던 수연이 더 편할겁니다. 실제로도 수연이 더 편하다고 은희에게 얘기하죠. (수연을 더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영수가 감당 할 수 없었던 자신을 향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인 듯 합니다. 스스로를 사랑 할 수 없었던 그에게 있어, 은희의 애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요.

    아쉽게도 이 부분에서 이야기가 조금 의아해집니다. 과연 영수는 왜 그토록 자신을 증오했던 걸까요. 이야기 순서상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존재해야 앞뒤가 맞는데, 어디에도 나타나지가 않습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다 침을 뱉는 모습은 그 감정의 결과 밖에 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영수의 심경변화가 조금 갑작스럽고 생뚱맞다고 느꼈습니다. 단순히 시골 생활에 '질렸다'라고 보기에는 그의 모습이 너무 행복했거든요. 그는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내칠만한 정당한 이유를 말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 설명의 생략으로 인해 한층 더 잔인한 사랑 이야기로 완성 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행복했던 두 사람의 사랑이 불명확한 이유로 변심한 남자로 인해 순식간에 깨어지는 것. 그리고 당연한 듯 여자는 죽어가고, 남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이유를 알 수 없기에 이별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이 것이 감독이 의도했던 바라면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별을 결심한 은희가 시골길을 마구 달리며 오열 할 때, 그녀는 이미 죽음을 결심한 듯 보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때 그녀는 어느 정도 죽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 중 가장 슬픈 장면이었으며, 또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임수정은 이번 영화로 인해 약간의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허진호 감독은 '행복'으로 인해 보다 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 화법은 또 더욱 새로운 것이었죠. 하지만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길의 끝은 어디로 향할까요. 설마 정말 통속적인 멜로드라마가 그의 영화의 완성형일까요. 여지 없이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만드는 감독입니다. 부디 매너리즘에 빠지지말고 또 한 번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를 선보여주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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