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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시르와 왈츠를
    검은발개/감상 2009. 2. 23. 03:01

    <바시르와 왈츠를>

    어느 날, 옛 친구와 함께 술집에 들른 영화감독 아리는 계속 반복되는 친구의 악몽에 관해 듣게 된다. 매일 밤 꿈에 어김없이 등장해 자신을 쫓는 정체 모를 26마리의 사나운 개들에 관한 이야기. 두 남자는 이 악몽이 80년대 초 레바논 전쟁 당시 그들이 수행했던 이스라엘 군에서의 임무와 어떠한 연관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오랜 시간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 아리는 자신이 당시의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서 전세계를 돌며 자신의 옛 친구들과 동료들을 찾아
    나선다. 아리가 과거의 비밀을 더 깊이 파헤쳐갈수록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형태로 그의 기억들도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감당 할 수 없는 현실은 허구와 마찬가지다. 한낱 병사에 지나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서 당시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전체적, 개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리다. 영화 속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서 나온 표현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가상의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환영과도 같은 장면의 연속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참전 경력이 있는 이스라엘 감독의 이 영화는 객관적이기도 하고 주관적이기도 한 독특한 시선을 유지한다. 


    전쟁의 긴 여정 속에서도 가장 극(!)적인 부분인 대학살에 관한 기억이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렸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줄거리 선택으로 인해 감독은 자신이 참전한 전쟁을 비교적 객관적인 방향에서부터 재구성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밝혀지는 각각의 사건들은 그리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그저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회상들이 모인다고 해서 전쟁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이라는 전인류적 비극을 기필코 막아보자는 거창한 신념이 아니다. 그들의 기억은 적어도 허황된 무용담이나 자기 방어적 변명으로 일관한 노인네들의 넋두리가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과거를 돌이켜보는 회고와 가깝다. 거짓으로 변질되지 않되, 반드시 진실을 기억하려 한다. 


    이스라엘쪽 참전 병사 한 명 한 명의 회상을 짚어가며 블러를 친 듯 비극으로 포장을 한 뒤 얄팍한 용서, 혹은 약간의 이해를 구하려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면 난 그저 기분만 더욱 상한 뒤 영화관을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가자지구 폭격만 봐도 이스라엘인들의 오만함은 익히 짐작할 만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러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은 희망적이다. 정말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말이다. 


    불청객처럼 엔딩장면을 채우는 실사-울부짖는 팔레스타인 여인들과 그들 가족의 시체-이 장면, 이 기억들을 그들이 좀 더 많이 보고 좀 더 많이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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