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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P.S. I LOVE YOU
    검은발개/감상 2008. 1. 6. 16:06

    - 잘 키운 남편 하나, 열 보험 안부럽다 -

    올해 여름엔가 가을엔가. 푸르덴셜이라는 보험회사의 한 광고는 정말이지 섬뜩한 것이었다. '10억을 받았습니다.'라는, 장님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솔깃한 카피 한 줄과 함께 잔잔하고 어여쁜 나레이션이 어쩌구 저쩌구 흘러나오는 내용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10억이란 것이 로또 당첨금도 아니고 강남 아파트 판 돈도 아닌 바로 남편의 생명보험금이었다! - 범인은 바로 이 안에 있다! 처럼 -  무시무시한 반전이 담겨있는 광고였다.
    또 있다. 어느 회사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죽어서도 자식 대학 입학 시키고, 시집 장가 잘 보내고 A/S 훌륭하게 잘하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보험을 든 사람인 것입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의 오컬트적인 광고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TV에서 불쑥불쑥 보여지기도 했었다.
    이건 뭐 돈 못벌어올 바에야 얼른 죽어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들에게 10억이나 안겨주라는 뜻인지 무척이나  헷갈리는 한편, 먼 곳에서 죽어라 일하고 계실 아버지께 불현듯 '효도해야지'라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고, 또 '난 절대 애같은 거 낳지 말아야지' 하는 처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한 동안 잊고 지냈던 그 생각들이 며칠 전 영화 <P.S. I LOVE YOU>를 보다가 번쩍 다시 떠올랐다. 지독하게 수동적이고 괴팍하기 그지 없는 아내를 두고 그냥 죽을라니 좀 불안해서, 자신이 죽은 후에도 아내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런 저런 기발한 방책들을 마련해놓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언뜻 보면 대견하기 그지 없는 정성과 애절한 사랑이 가득 담긴 따뜻한 멜로물이다. 하지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밝은 미래를 다짐하는 여자의 모습이 화면을 꽉 채움에도 불구하고, 그 위로는 뇌종양이라는 거대한 고통을 애써 참으며 아내를 위한 이런 저런 계획을 열심히 짜맞추는 남자의 모습이 시종일관 오버랩되어서, 난 영화를 보는 내내 좀 불편했다.
    건너 건너 들은 영화 홍보사 직원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이 영화는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과 애인에게 보여줘야 할 영화'로 홍보 컨셉을 잡았다고 한다. 무섭다. 이토록 노골적인 수준의 여성 판타지라니, 차라리 공포 영화를 한 편 보는게 덜 무서울 듯 하다. 이 땅의 남자들에게 부여되는 책무 중의 하나가 과연 '죽어서도 가족 살 길 마련하는 것'일까. 어쩌면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운 한 남자의 엄살섞인 불평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 영화가 그리 좋지 않았다.

    앞에서도 살짝 말했듯이 이 영화는 남겨진 '여자'의 이야기가 아닌 도입부에 한 씬 등장한 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린 '남자'의 이야기이다. 여자는 그저 남자가 써놓은 잘 짜여진 시나리오의 한 등장인물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뿐이랴. 이 남편은 이야기 안과 밖에서 이상적인 남편감으로 묘사되어진다. 질병의 고통을 이겨내는 막강한 인내심, 아내의 행동패턴을 정확히 추리해내 쥐락펴락하는 예리한 판단력, 어떠한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유머러스함, 수준급의 노래 실력, 게다가 죽어서도 원격 지원을 아까지 않는 저 세심한 배려까지. 저 정도의 남자라면 내 인생이라도 맡길 수 있겠다.
    그에 비해 아내의 모습은 굉장히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툭하면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쉴 새 없이 돈타령이며, 별 이유도 없이 엄마에게 반항하며, 끊임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의지한다.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였다. 게다가 이러한 성향의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힐러리 스웽크라니!
     갖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종래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히 제 살길 찾아나서는 여자들의 이야기인 '칙릿' - 프라다 코트를 걸친 악마같은 상사 밑에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하는 왕눈이의 이야기, 혹은 주위에 온통 쓰레기 같은 남자들 뿐인데다가 자기 먹고 살길 찾기도 힘든 명품구두홀릭 칼럼니스트와 그의 멋진 친구들 이야기 등등 - 들이 유행하는 시대에, 이런 류의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 하긴 명품구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그 궤를 같이 하긴 한다.

    '못난 여성'이 '멋진 남성'의 도움으로 성공을 거머쥔다는 이야기가 여성 판타지라는 사실에는 별 이견이 없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말 잘듣는 여성'이 똑똑하고 잘난 놈의 지시대로 행동하여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구시대적인 착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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