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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에서 깨다
    검은발개/낙서 2008. 11. 18. 09:26


    불현듯 이상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깼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쯤 된다면 위스키를 투핑거로 마시고 그럴듯한 감상이라도 내뱉었을텐데, 연약한 난 그저 허기와 공허감으로 괜시리 잡생각에 빠져든다. 게다가 초라한 내 자취방엔 위스키는 커녕, 멍하니 걸터 앉을만한 식탁의자도 없다. 이따금씩 사유는 결핍에서 비롯된다. 비록 그것이 보잘것 없는 것이긴 해도. 대체 지금 난 뭐라고 지껄이는건가.

    이렇게 낯선 밤이면 항상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라는 회의감에 젖어든다. 30년에 가까운, 한 세대에 필적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무언가 만족할 만한 것을 이루어낸 적이 없다는 슬픈 생각에 한없이 빠져든다. 지금 내가 이렇게 매일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며 남의 돈이나 벌어다주고 있을 이때에, 어디선가 나와 동등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누군가가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명문(名文)에 마침표를 찍고 있다면? 혹은 또다른 누군가가 초끈이론 따위 한방에 증명 할 수 있는 물리법칙을 완성하기 직전이라면? 아니면 또 또다른 누군가가 세상에 둘도 없을 미인의 브래지어끈을 끌르기 직전이라면? 생각만 해도 그 아득함에 눈 앞이 먹먹해질 정도이다. 

    곧 한달하고도 반달이 지나면 서른이 된다. 나이의 첫자리수가 바뀔 때면 누구나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지기 마련이다. 이제까지의 삼십년이 흐릿한 형상으로 눈 안쪽에 어른어른 자리잡는다. 앞으로의 30년은 이제까지의 30년과 무엇이 다를것인가. 

    꿈에서는 커다란 거울이 등장했다. 무언가를 비추는 즉시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질 정도로 깨끗하고, 커다란 전신거울이었다. 포장을 뜯은 뒤 방 한 구석 적당한 곳에 세우려는데, 받침대도 없고 지지할 만한 버팀목도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메고 있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 거울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제서야 나는 그 큰 거울이 두개의 거울을 포개놓은 것임을 알았고, 즉시 펼쳐서 세운 다음 나 자신을 비추어보았다. 두 거울 속에 비친 두 개의 내 모습은 당연히 똑같았다. 하지만 자세히보니 한쪽은 웃고 있었고, 한쪽은 울고 있었다. 놀람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구장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하루키 앞으로 갑자기 야구공이 날아온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 소설을 써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뻥임이 분명한 이 '계시'에 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내 욕구를 자극한다. 그럴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 계시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주 로또를 사는 심리나 마찬가지다. 부질없고, 바보같다.

    멋진 인생을 살겠노라 다짐하는 것은 언제나 가장 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것인가를 생각하는 일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렵다. 서른 정도 됐으면 명확하진 않더라도 대충의 윤곽은 보여야 될텐데 말이다. 훌륭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던가, 진로를 홱 바꿔 물리학에 뛰어든다던가, 하다못해 세상 둘도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브래지어끈을 끌르기 위해 연습한다던가 같은 것들 말이다. 

    밤이 얼마나 지났는가, 아직 절반도 못 되었네.
    뭇별들이 눈부시게 빛을 내누나.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 어둡기만 한데
    그대는 어이해 이 고장에 머무는가.

    금오신화를 지은 김시습의 이 한시는 (내멋대로 해석을 하긴 했지만) 나를 달래주기도 하고 재촉하기도 한다.
    은 아직 반이 넘도록 남아있고,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다. 어두운 골짜기를 떠나서, 부디 내가 있을 고장으로 갈 수 있도록.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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