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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알/구례 2022. 3. 9. 22:33

     

    구례에 내려온 지 2주가 되어간다. 남편과 영상통화를 하다보면 내 서울집의 풍경이 간간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낯설 정도로 여기에 적응하고 있다. 눈앞의 현재에 잘 현혹되고 시야가 좁은 나의 특성 탓인 듯도 하다. 

    커다란 한옥 펜션 한 채에 여덟 가구가 들어와 있다. 손재주가 좋고 부지런한 사장님은 집 수리를 직접 하신다. 한옥인데다 집의 연한이 좀 있는 편이라 외풍이 심하니 겨우내 단열공사를 해오셨고, 지금은 정원이나 펜션 내 수영장, 세탁기 설치 등의 자잘한 작업을 계속 하고 계신다. 농촌유학 선배 맘이 이렇게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사장님은 없다길래 감사한 마음으로 잘 생활하고 있다. 

    여덟 집이 다 달라서 장단점이 제각각이다. 부엌에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 방들도 좀 있고, 되게 좁은 방도 있고, 넓은 방도 있고,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방도 있고, 다락이 있는 방도 있다. 난 유일한 복층 집을 차지한데다 부엌에 따뜻한 물이 나오고 창문도 두 개라 아주 만족스럽다. 특히 우리 아이들은 이층집에 로망이 있었으므로, 그 로망을 실현한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계단이 가팔라서 내 무릎은 점점 아파오지만 뭐.. 언제 이런 곳에서 살아보겠어. 

    애 셋인 집 한 가구와 애가 하나인 집 한 가구를 제외하면 다 애가 둘씩 있다. 즉 애들만 열 여섯명인데 성비로 따지면 남자아이가 여섯, 여자아이가 열 명이다. 중학생 1명, 6학년 2명, 5학년 3명, 4학년 1명, 3학년 4명, 2학년 2명, 7세 2명, 6세 1명. 우리 펜션 외에 다른 숙소에도 두 가구가 있는데 볼 일이 많지는 않다. 아이들은 주로 동성끼리 몰려다니며 어울리는데 노는 모습이 확연히 달라 어리둥절할 정도다. 여자아이들은 꽁냥꽁냥 이집 저집 드나들거나 동네 탐험을 하거나 땅을 파며 노는데, 남자아이들은 주로 우리집 -_-;에 틀어박혀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몸놀이를 한다. 아마 우리집이 가장 영상매체 친화적..이라 그렇게 되는 듯한데, 일주일간 지내보고 안되겠다 싶어서 아이들을 밖에서 놀게 할 다양한 방법을 모색중이다. 다른 엄마들이 여자아이들 얼굴과 이름은 익혔는데, 남자아이들을 거의 못 익히고 계신 듯.

    아침에 잠시 집 앞 벤치에 앉아있었더니, 처음 보는 알록달록한 새가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검색해보니 곤줄바기라는 새인 듯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근처 축사의 소 울음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누구를 부르는 것처럼 애절하다. 수탉은 아침에만 우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해가 떠 있는 내내 툭하면 울어댄다. 며칠 전엔 애들이 땅을 파다 동면중인 개구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큰 애는 집에서 보이는 거미나 무당벌레들을 열심히 잡아 방생해주고 있다. 

    살림꾼인 다른 엄마들은 테이블이며 침대를 트럭에 싣고 와 집답게 깔끔히 해놓고 살기도 하시던데, 나는 그냥 피난민같이 죽 늘어놓고 살고 있다. 이런 걸 보면 그냥 너저분한 성격같다. 식탁이 없어서 사장님이 주신 테이블로 지내고 있는데, 오래 앉아있다보면 허리나 무릎이 아프기도 하다. 주말에 들르신 시어머니가 넌지시 아가씨에게 말씀하셨는지, 아가씨가 안 쓰는 테이블을 보내준다고 해서 고맙게 받아 쓸 예정이다. 문제는 의자가 없다는 거지만... 일단 받아보지 뭐...

    사장님이 800만원을 들여 지하 150미터를 뚫어 나오는 암반수가 각 방마다 공급되고 있고, 이걸 해마다 24만원씩 들여 수질검사를 하는데 파는 생수보다 더 수질이 좋게 나오니 생수 사지 말고 그냥 받아 마시라고 하셨다. 처음엔 영 미심쩍었지만 한 번 마셔보니 물맛이 좋아서 그냥 마시고 있다. 2주만에 피부가 무척 좋아졌는데, 이게 암반수 덕분인지 아님 추워서 계속 따뜻한 차를 타 마신 덕분인지는 알 수 없다. 

    먼 길을 내려왔으니 이 안에서 많이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집안에 틀어박혀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직은 춥고 삭막한 풍경이라 그렇기도 하고, 아이들 없이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것도 있다. 산수유 꽃이 피려 하고 있으니 이제 슬슬 돌아다녀 봐야지.

     

    오늘 사장님이 시험삼아 받아 본 물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아직 3월 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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