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발개/낙서
집
검은발개
2015. 5. 4. 22:50
지훈씨네 조문을 마치고 예정에 없이 부산 본가에 다녀왔다. 보름 무렵이라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집이 환히 보였다. 부산집은 매번 더 낡고 작아지는 것 같다. 빨간 벽돌들은 무력하게 색이 바랬고, 여기저기 벗겨지기 시작한 벽을 감추려 서툴게 칠한 페인트 덕에 오히려 허름함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부모님은 잠결에 잠긴 목소리로 문을 열어주셨다. 집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느낌의 냄새와 공기가 훅 들이쳤다. 집은 여전했다. 내 나이보다 정확히 열살이 어린 나의 본가. 내 덩치가 커갈수록 상대적으로 집은 작아져갔지만, 몸에 꼭 맞는 듯한 묘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형편 없는 수압의 수도꼭지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수조가 거꾸로 설치된 변기도 그대로이고, 정글처럼 온 집을 가득 메운 갖가지 식물들도 여전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어느 문틀 조그마한 흠집 하나만 보아도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 집. 새벽 세시나 되어서야 누운 아랫목은 딱 알맞게 따뜻했다.
공간은 시간을 담는다. 그리고 어떤 공간엔 다른 곳 보다 더욱 밀도 높은 시간이 꾹꾹 눌러 담겨지기도 한다. 마치 온갖 잡동사니들을 이것저것 쑤셔넣어놓은 다락방 속 커다란 장난감 상자처럼.
건축가 정기용은 어느 낡은 농가를 가리키며 ' 세월의 때가 묻어 시간이 머무는 집'이라고 칭했다.농가의 마당 한 공간은 커다란 나무가 차지하고 있었고, 외벽은 담쟁이 덩굴로 온통 뒤덮혀 있었으며, 회색빛 자갈이 깔린 마당엔 오리들이 꽥꽥거리며 뛰놀고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비춰들어와 거실을 물들이는 햇살은 너무나도 푸근하고 따뜻해보여서 금세 졸음이 몰려올 듯 했다. '시간이 머문다' 라는 말이 그대로 집이란 형태로 바뀐 풍경이었다.
이안이는 이사 이야기만 나와도 몸서리를 친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속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 까닭이 너무나도 순수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엄마, 이사가면 티라노킹은 어떻게 해?"
"다 가져가야지. "
"저걸 어떻게 다 가져가?"
"이사 갈 땐 전부 다 가져가는거야. 화분도 냉장고도."
"냉장고도?!!"
"그럼. 다 가져가야지."
"그걸 우리가 어떻게 다 가져가?"
"이사 할 때 아저씨들이 여러명 와서 다 옮겨줘."
"근데 상자가 많이 있어야겠네?"
"응. 아저씨들이 상자도 다 가지고 오실꺼야."
알고보니 이안이는 지금 집의 물건들을 모조리 두고 가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 아이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태어나서부터 여태까지 죽 살아온, 세상 전부나 다를 바 없는 엄마와 함께 해온 시간과 물건과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억들. 이사란 곧 그것들과의 이별로 여겨졌을 것이다.
실제로 이안이의 그런 착각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우리는 이사를 가면서 분명히 무언가를 옛 집에 두고 온다. 아이의 키를 재기 위해 금을 그어놓았던 문짝까지 새 집에 가져갈 수 없 듯, 어떤 기억은 그 공간을 떠나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또 다시 온전히 되새기기란 불가능해진다. 나는 그래서 늘 오래된 어느 장소와의 작별이 내심 아쉽다.
또 다시 정기용 건축가의 말을 빌리자면, '도시에선 시간이 도망가버린다.' 단골이었던 작은 술집은 재건축으로 사라지고, 어느 할머니의 단촐하고 소박한 집은 커다란 빌라를 짓기 위해 단숨에 헐린다. 그 과정에서 얻는 것들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보다 정말 큰 것일까. 아니 애초에 비교가 가능 한 것일까.
나는 내 아이들, 이안이와 지안이에게도 낡았지만 소중한 과거를 온전히 만들어주고 싶다. 뭐, 욕심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