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발개/낙서

종묘 옆 골목길

검은발개 2007. 10. 23. 00:17

종묘 옆 샛길로 구불구불이어져있는 골목에는 온통 할아버지들 뿐이다. 그 골목에 발을 디디기만 해도 공기의 색이 달라지는 듯 하다. 한 발짝 걸음을 디디는 것 만으로 생겨나는 급격한 이질감은 낯선 이국에 갓 도착한 느낌과는 또 다르다. 뭐랄까. 익숙했던 곳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랄까. 내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소외감이랄까.

잠깐 한 눈을 팔기만 해도 금세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묘한 광경이다. 어쩐지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정겹기도 하지만 괜시리 우울하다. 그 광경은 나로 하여금 자연스레 인류의 마지막 날을 연상케한다. 번식의 능력을 영원히 잃어버린 종의 쓸쓸한 뒷모습 같다.

언젠가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들의 뒷모습이 쓸쓸함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IMF 이후부터일까. 회사에서 시달리고, 집에 와서도 기를 펴지 못하는, 초라함의 대명사 격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그 골목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던 것은, 이러한 초라함의 궁극적인 형상이 바로 그들 할아버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보면 건방진 생각이다. 내가 그들의 삶을 대체 얼마나 안다고 쓸쓸하니 어쩌니 지껄이는건가. 내 이런 느낌들과는 달리 할아버지들은 모두 밝은 표정이었다. 길가 좌판에 놓인 중고 물품들을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살피고, 장기 훈수를 두는 친구에게 호통을 치며 껄껄거리고,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먹고 가라며 순대 한접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어깨를 움츠린 사람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난 그 골목과, 그 골목에 당연히 이어져있는 번화가 사이의 단절이 슬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한 구석에 내몰려 있는 듯한 느낌. 이들에 의해 그 번화가들이 만들어진 건지도 모를 일인데, 왠지 당연히 무시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냥 그런게 아쉬웠던 것일까.